처음에는 웃음이 났다.
딱히 근거도 없고
조금만 상처받아도 쉽게 사라질,
'아무것도 아닌' 정도의 감정이었을 때.
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.
그러더니 점차 농도깊게, 진득하게 달라붙어서,
그 사람이 이쪽을 볼 때마다, 말을 걸 때마다, 이름을 부를 때마다ㅡ
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 마냥 행복하고,
내 몸 속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인도 안되는 어떤 곳이
찡- 해지면서 척추로 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을 만큼' 가득차는' 무언가를 느꼈다.
그 충만함이란, 의미도 없는
그의 말에, 손 짓에, 미소에, 눈빛에 내 멋대로 미친듯이 의미를 부여하여,
설탕에 염산을 뿌린듯이 무섭게 부풀어오르지만, 결과적으로 봤을땐 새카맣게 타버린 쓰디 쓴 달콤함이 되어서, 채우면 채울 수록 비워지는 허망함과 비참함을 느끼게 했다.
빈 잔이었을 때는 그것이 빈 잔 인줄 몰랐었다.
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채워지더니 딱 반정도 되었을 때에
멈칫하여 그것을 비교적 객관으로 바라보았다.
그때는, 뭔가 행복하기도하고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만 둘 수 없는 때도 아니었다. 그만 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.
그 쯤에서 그만 두었으면 지금 같은 후회는 하지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계속 잔을 채워 나간다.
' 나도 모르는 사이에' 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사실 알고 있었다.
잔이 차다가, 차다가, 어느새 넘쳐흐른다.
그러나 이제 와서 비우기에는,
차갑고 맑은 보석같은 그 것이 애처롭고, 안타깝고.....이미 늦었고.
하지만 계속 채우자니 내 조그만 잔이 너무 버거워, 넘쳐흐르는 그 것을
수습하다가,
수습하다가,
수습하다가,
지쳐버린다.
그때, 그 눈이 먼듯 채우고 채웠던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지만
닦아도 닦아도 자국이 남아, 얼룩이 되어서
' 다 비웠을까?' 하고 다시 보면 한 방울, 한 방울 처음보다 선명하게, 빠른속도로, 다시 채워져서 또 한번 무너진다.
그런 내가 초라하고, 우습고, 사랑스럽고, 창피한데,
그 사람은 나를 모른다.
그 사람은, 이런 나를 모른다.